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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헥사데시멀

EP.1 늦은 귀가

icenovel
2025년 02월 27일
배경 음악
진수는 느리게 2차로 위를 주행했다. 헤드라이트 빛들이 줄지어 그의 왼편을 앞질러 나간다. 그들은 어김없이 한줄기 붉은 선으로 시야에서 벗어난다. 어둠으로 가득한 고속도로는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다. 이따금 굽은 곡선을 만들면서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변하는 것이라곤 라이트에 반사되는 단조로운 표지판들이 전부다.

라디오에서는 예브게니 코롤리오프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연주도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다. 실제로 연주는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마침, 진수가 고속도로에 올랐던 시간과 비슷했다.

바흐가 먼저였는지, 고속도로가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동시였을지도 모른다. 진수의 속도 바늘이 일정하게 80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그 때문이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 곡의 선율로 선형의 도로를 등속으로 더듬어 가는 일. 그건 하나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수는 자신이 예술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기계적으로 차를 몰고 있을 뿐이었다.

도로표지판의 숫자가 바뀔 때마다 영원할 것 같은 도로가 곧 끝이 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진수는 다른 건 몰라도 ‘영원할 것 같은 것’과 ‘영원한 것’은 반대말이라는 것은 잘 알았다.

신이나 우주라면 몰라도 고속도로와 한 곡의 음악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진수의 바람은, 이 외길의 평탄함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멜로디의 잔잔함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뿐이다.

진수는 곧 그것이 자신의 복잡한 내면과 대조적이기에 생기는 바람임을 깨달았다. 복잡한 내비게이션 화면이 그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비게이션은 동시에 고속도로가 끝났음도 알려주었다. 코롤리오프의 기나긴 연주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진수는 좀 더 느린 속도로 국도에 접어들었다.

늦은 시간이라 통행량은 거의 없었다. 주차를 마쳤을 때 라디오에서 때마침 새벽 2시를 알려왔다. 평소 진수가 불안이란 녀석의 눈치를 보면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의 자발적 밤 중독 상태는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장애가 틀림없다. 진수는 남들보다 좀 더 심한 것뿐이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밤의 시간이 유혹적인 것은 당연하다.

진수의 문제는 그 시간이 소모적이라는 것이다. 건설적인 내용이라고는 전혀 없는 시간 죽이기 좋은 영상들을 모니터로 감상한다. 그리고 커뮤니티를 전전하면서 사람들의 소모적인 글들로 위안을 삼는다. 자신만이 헤매고 있는 건 아니라고. 그것도 아니면, 일본 성인 비디오를 보면서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기계적이고 관성에 젖은 자위행위를 서둘러 끝낸다.

그것이 주는 쾌감이라고는 한줌의 한숨을 쉬는 시간에 불과하지만, 그의 습관은 말 그대로 관성에 젖어 있다. 게다가 그 깊은 한 숨은 어김없이 쾌감의 뒷자리에 놓여 짙은 대비를 이룬다.

그런 소모의 시간이 하루 중에 가장 빠른 시간이다. 시간이 생략된 것처럼, 곧장 새벽 4시가 된다. 그리고 새벽 4시는 진수에게 있어서 갈림길의 시간이다. 잘 것인가 안 잘 것인가.

4시에 잠들면 8시에 일어나 출근을 한다. 10시에 사무실에 도착하면 적당히 좋지 않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일한다. 반면에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면 피곤한 상태로 일을 하고 퇴근해 돌아와 버티다가 저녁 9시에 잠이 든다. 그러면 새벽 2시가 되면 저절로 깨어난다. 당연히 다시 밤을 꼬박 새우게 된다.

그런 그가 지금, 모니터 앞에 있지 않다는 것은 특수한 상황이다. 내일이 주말인 것과는 관계없다. 진수에게 주말이란 그저 새벽 2시에서 새벽 4시 사이의 시간이 좀 더 길어지는 것뿐이다. 그것은 얼마간 길어지더라도 별로 체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처럼 암막 커튼이 내려진 캄캄한 방의 모니터 앞에 앉아 액션 영화를 볼 테니까. 배가고파지면 햄버거나 치킨을 먹고 기름이 묻은 손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만지고, 이따금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자위행위를 한다. 찝찝해서 견딜 수 없는 저녁이 되어서야 샤워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모니터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것이 그의 주말이며, 평일 새벽 2시의 시작이다.

생각해 보면 그의 여가 시간을 이토록 길게 설명한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가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이라고는 그의 이름대로 겨우 이진수로도 쉽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고 있는 오늘은 예외적인 상황이다. 아니, 특별하다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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